'카타리나블룸의잃어버린명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11/30 [세계문학] 하인리히 뵐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



21세기, 카타리나 블룸의 방아쇠는 누구를 향하는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문 선 경


 하인리히 뵐은 황색 언론의 폭력에 의해 삶의 기반이 무참히 짓밟히는 한 여인을 위하여 이 소설의 제목을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제목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던지 밑에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까지 달아두었다. 이 친절한 책 제목에 근거하여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언론에 의한 폭력이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한 구절과 기괴하게 어울림을 파악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의 일생에서는 지극히 경미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언론과 세간의 호기심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그 미세한 지점으로부터 언론의 폭력은 얼마든지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폭력은 개인적인 삶의 변두리에 있던 사실들을 어느새 삶 전체를 규정짓는 결정적인 행적으로 왜곡하고, 주변 사람들의 언행을 맥락에서 절개해내어 그 의미를 강제로 변형시켜 폭력의 재생산 과정에 이식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한 개인의 명예는 처참히 붕괴된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폭력의 결과가 제목에서처럼 단순히 카타리나 블룸이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으로만 끝나는가? 물론 그녀가 삶의 기반이 되었던 착실함, 근면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그녀의 긍지들을 모조리 잃고 ‘살인범의 정부’로서, ‘테러리스트의 공조자’로서, ‘음탕한 공산주의자’로서 언론의 비난을 받는 ‘명예훼손’의 과정은 이미 그 자체로도 한 개인이 감당하기 버거운 비극이다. 그러나 언론의 폭력은 단순히 ‘명예훼손’의 차원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존재 양식’의 영역에서까지도 한 개인을 무참히 공격한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존재 양식까지 억압하는 언론의 폭력은 어떻게 자행되는가? 나는 소설에서 그것이 수리적으로 가장 치밀하게 묘사된 부분이 바로 다음과 같은 24장의 ‘기름 연비 분석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름 값은 그녀 자동차의 주행 거리 표시기가 보여주는 현저히 높은 숫자와도 관련되어 있다. 블로르나 씨 집과의 왕복거리는 약 6킬로미터, 히페르츠 씨 집과의 왕복 거리는 약 8킬로미터, 볼터스하임 부인의 집에 다녀올 때는 약 4킬로미터 거리라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고 한다. 넉넉히 계산해서, 평균 잡아 한 주에 한 번 시간외근무를 한다 치고, 이것 역시 넉넉하게 계산해서 20킬로미터로 보고, 이를 하루 주행 거리로 바꾸어 계산하여 약 3킬로미터 정도는 더 생각한다면, 매일 대략 21킬로미터에서 22킬로미터를 달리는 셈이다.....(중략)....거기에 2×8000을 더하면, 그녀의 자동차 주행 거리는 지금 72,000 정도여야 하는데, 실제로 거의 102,00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중략)....여전히 25,000킬로미터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대체 어디를 그리 자주 차를 몰고 다녔는지. 그러면 그녀가 - 그는 정말 다시 무례한 암시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의 질문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 혹시 누군가를, 아니면 여러 명의 사람을 어디선가 - 대체 어디서 - 만났다는 건가?


 타인에 의하여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그녀의 주행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미 주행기록으로 대변된 그녀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누구에게나 논리적인 하자 없이 똑똑히 이해되어야 하고 증명되어야 하는 백과사전 수준의 지식으로 낱낱이 파헤쳐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설명되지 않는 주행거리’를 놓고 파생되는 무례한 암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제 그녀가 자신의 삶의 궤적을 놓고 타인의 시선에서 딱 맞아떨어지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드러날 경우, 그 부분에 대해 즉각 해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불분명한 사안에 대한 불분명한 진술은 단순히 사법적인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카타리나 블룸 자신이 절대 허용하지 않았던 언론의 무차별적인 의심에 의해 완전히 다른 사실로 그녀를 공격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녀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기타 경비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본인조차 이유를 잘 모르고 돌아다닌’ 주행거리에 대한 책임과 까닭을, 자신의 필요가 아닌, 오로지 언론과 대중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궁금증으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억측과 모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누려야 하는 시간에 대한 주권을 박탈당한다. 이 ‘시간에 대한 주권 박탈’이야말로 한 개인의 ‘존재 양식’, ‘존재 주권’에 대한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예의 실추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존재 양식마저 위협하는 언론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하여 1974년의 카타리나 블룸은 일간지 기자를 향해 총을 쏘았다. 죄책감을 느껴보려고 돌아 다녀봐도 도통 그럴 수가 없기에 너무도 떳떳이 자백할 수밖에 없었던 27세 일반 여성의 범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당당함은 오히려 언론이 자행하는 폭력의 부당성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그러나 21세기의 카타리나 블룸은 어떠한가. 언론의 폭력은 나아졌는가? 그것은 한 개인의 명예를 이전보다 덜 훼손시키고, 그 존재 양식을 이전보다 덜 위협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언론의 폭력을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은 구시대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언론의 폭력을 자극할 수 있는 기술은 날이면 날마다 급속히 발전했다. 그리하여 한 개인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시간은 닷새가 아닌 하루, 아니 단 몇 시간으로 단축되고, 한 개인의 존재 양식을 위협할 수 있는 기록 분석과 악의적 발언의 수단은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 가운데 21세기 카타리나 블룸의 손에 쥐어진 총은 누구를 향하는가.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일간지 기자가 아니다. 21세기의 카타리나 블룸은 자기 자신의 머리를 향하여 총을 쏜다. 그것이 우리 현실의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Posted by 문모양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09/12/02 2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