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카타리나 블룸의 방아쇠는 누구를 향하는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문 선 경


 하인리히 뵐은 황색 언론의 폭력에 의해 삶의 기반이 무참히 짓밟히는 한 여인을 위하여 이 소설의 제목을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제목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던지 밑에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까지 달아두었다. 이 친절한 책 제목에 근거하여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언론에 의한 폭력이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한 구절과 기괴하게 어울림을 파악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의 일생에서는 지극히 경미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언론과 세간의 호기심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그 미세한 지점으로부터 언론의 폭력은 얼마든지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폭력은 개인적인 삶의 변두리에 있던 사실들을 어느새 삶 전체를 규정짓는 결정적인 행적으로 왜곡하고, 주변 사람들의 언행을 맥락에서 절개해내어 그 의미를 강제로 변형시켜 폭력의 재생산 과정에 이식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한 개인의 명예는 처참히 붕괴된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폭력의 결과가 제목에서처럼 단순히 카타리나 블룸이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으로만 끝나는가? 물론 그녀가 삶의 기반이 되었던 착실함, 근면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그녀의 긍지들을 모조리 잃고 ‘살인범의 정부’로서, ‘테러리스트의 공조자’로서, ‘음탕한 공산주의자’로서 언론의 비난을 받는 ‘명예훼손’의 과정은 이미 그 자체로도 한 개인이 감당하기 버거운 비극이다. 그러나 언론의 폭력은 단순히 ‘명예훼손’의 차원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존재 양식’의 영역에서까지도 한 개인을 무참히 공격한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존재 양식까지 억압하는 언론의 폭력은 어떻게 자행되는가? 나는 소설에서 그것이 수리적으로 가장 치밀하게 묘사된 부분이 바로 다음과 같은 24장의 ‘기름 연비 분석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름 값은 그녀 자동차의 주행 거리 표시기가 보여주는 현저히 높은 숫자와도 관련되어 있다. 블로르나 씨 집과의 왕복거리는 약 6킬로미터, 히페르츠 씨 집과의 왕복 거리는 약 8킬로미터, 볼터스하임 부인의 집에 다녀올 때는 약 4킬로미터 거리라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고 한다. 넉넉히 계산해서, 평균 잡아 한 주에 한 번 시간외근무를 한다 치고, 이것 역시 넉넉하게 계산해서 20킬로미터로 보고, 이를 하루 주행 거리로 바꾸어 계산하여 약 3킬로미터 정도는 더 생각한다면, 매일 대략 21킬로미터에서 22킬로미터를 달리는 셈이다.....(중략)....거기에 2×8000을 더하면, 그녀의 자동차 주행 거리는 지금 72,000 정도여야 하는데, 실제로 거의 102,00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중략)....여전히 25,000킬로미터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대체 어디를 그리 자주 차를 몰고 다녔는지. 그러면 그녀가 - 그는 정말 다시 무례한 암시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의 질문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 혹시 누군가를, 아니면 여러 명의 사람을 어디선가 - 대체 어디서 - 만났다는 건가?


 타인에 의하여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그녀의 주행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미 주행기록으로 대변된 그녀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누구에게나 논리적인 하자 없이 똑똑히 이해되어야 하고 증명되어야 하는 백과사전 수준의 지식으로 낱낱이 파헤쳐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설명되지 않는 주행거리’를 놓고 파생되는 무례한 암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제 그녀가 자신의 삶의 궤적을 놓고 타인의 시선에서 딱 맞아떨어지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드러날 경우, 그 부분에 대해 즉각 해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불분명한 사안에 대한 불분명한 진술은 단순히 사법적인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카타리나 블룸 자신이 절대 허용하지 않았던 언론의 무차별적인 의심에 의해 완전히 다른 사실로 그녀를 공격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녀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기타 경비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본인조차 이유를 잘 모르고 돌아다닌’ 주행거리에 대한 책임과 까닭을, 자신의 필요가 아닌, 오로지 언론과 대중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궁금증으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억측과 모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누려야 하는 시간에 대한 주권을 박탈당한다. 이 ‘시간에 대한 주권 박탈’이야말로 한 개인의 ‘존재 양식’, ‘존재 주권’에 대한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예의 실추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존재 양식마저 위협하는 언론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하여 1974년의 카타리나 블룸은 일간지 기자를 향해 총을 쏘았다. 죄책감을 느껴보려고 돌아 다녀봐도 도통 그럴 수가 없기에 너무도 떳떳이 자백할 수밖에 없었던 27세 일반 여성의 범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당당함은 오히려 언론이 자행하는 폭력의 부당성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그러나 21세기의 카타리나 블룸은 어떠한가. 언론의 폭력은 나아졌는가? 그것은 한 개인의 명예를 이전보다 덜 훼손시키고, 그 존재 양식을 이전보다 덜 위협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언론의 폭력을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은 구시대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언론의 폭력을 자극할 수 있는 기술은 날이면 날마다 급속히 발전했다. 그리하여 한 개인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시간은 닷새가 아닌 하루, 아니 단 몇 시간으로 단축되고, 한 개인의 존재 양식을 위협할 수 있는 기록 분석과 악의적 발언의 수단은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 가운데 21세기 카타리나 블룸의 손에 쥐어진 총은 누구를 향하는가.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일간지 기자가 아니다. 21세기의 카타리나 블룸은 자기 자신의 머리를 향하여 총을 쏜다. 그것이 우리 현실의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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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2 2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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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있어야 할 것이 빛 속에 있을 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 푼짜리 오페라’를 읽고


 


문 선 경



 밝은 대낮, 달리는 차 안에서 멍청한 시선을 창 밖에 걸쳐두고 있던 중, 돌연 저편 도로 위에 치어 죽은 강아지(였던 것)의 시체를 볼 때, 그 검은 껍질과 시뻘건 살덩어리가 어지러이 뭉개진 흔적 어딘가에서 우리의 의식은 또 한 번 미세하게 구겨진다. 뒤이어 차에서 내려 도로를 걷는 빽빽한 인파들, 그 사이를 터무니없이 가르고 있는 어느 고개 숙인 걸인의 웅크린 상반신, 그 절반의 그림자 위에서 우리의 의식은 또 한 번 소리 없이 깨어진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 있어야 할 것이 빛 속에 있을 때, 지식의 범위 안에 있으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따라서 도무지 보고도 듣고도 싶지 않은 것의 형상을 아무 예고도 없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수용해야만 할 때의 비극이다. 그것이 왜 ‘비극’인가는 분명하다. 우리들 눈앞의 일그러진 풍경을 바로잡기에 우리의 손이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대부분은 이 놀라움과, 당황스러움과, 불편함이 뒤섞인 카오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소심히 시선을 돌린다, 눈을 감는다. 


 그런데 여기, 이 깊은 어둠 속에 기어코 스포트라이트를 들이대는 극작가가 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이트는 그의 희곡작품 『서 푼짜리 오페라』에서 걸인들의 구걸, 도둑들의 도둑질, 그리고 창녀들의 매춘행위가 난잡하게 포진한 19세기 말 런던의 그늘진 거리를 정숙해야 마땅할 오페라 무대의 한 가운데로 보란 듯이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거리의 유행가, 장타령을 정신없이 섞어가며 눈을 꼭 감고 있던 독자를 머리가 얼얼해질 만큼 흔들어 깨운다. 악명 높은 신사 강도 칼잡이 ‘매키’로부터 야밤에 남의 집 마굿간에서 결혼식을 올린 딸 ‘폴리’를 되찾기 위해 경시청장 ‘브라운’을 압박하는 거지왕 ‘피첨’,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의 사건들은 가족, 결혼, 우정, 사랑, 신뢰, 도덕 그 모든 것이 허울에 지나지 않는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와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긍정적인 의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온갖 배신과 욕망의 가락은 서푼어치도 되지 않을 인간 매키 매서에게 영국 여왕이 사면 및 신분 상승을 베푸는 다소 황당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불협화음은 책을 덮는 독자에게 결코 서푼짜리일 수 없는 삶의 무거운 고민을 부과한다.


 『서 푼짜리 오페라』에서 매키 매서에게 내려지는 사형선고는 정당한가? 물론 그는 이 도시를 둘러싼 도둑질, 방화, 살인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자, 여인에 대한 지조도 없이 성적인 욕망에 철저히 사로잡힌 채, 온갖 위기의 상황을 돈으로 모면하여 벗어나려 할 만큼 사악하고 비굴한 캐릭터이다. 따라서 그 정도의 개인에게는 응당 사형이라는 죄 값이 합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죄 값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수대에 오른 매키 매서의 그림자 속에 드리워진 모순된 현실의 무게가 그 한사람만의 몫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매키 매서가 교수대에 오른 이유는 직접적으로 법보다 돈의 문제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피첨’은 자신의 거지사업이 방해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잡아들이려 했고, ‘제니’는 돈에 매수당하여 그를 밀고하였으며, ‘브라운’은 대가가 불충분했기에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법은 명목상의 허울일 뿐, 돈이 실질적인 사회의 질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몰락해가고 있는 계층의 몰락해가고 있는 대표자’의 얼굴에서 다른 무수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매키 매서 한 사람을 사형시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현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사형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 앞에 ‘여왕의 사면’이라는 비현실적인 결말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 서푼어치 희망의 메시지도 허락하지 않는다. ‘왕의 말 탄 사신이 언제나 온다면 우리 삶은 쉽고 평화로울’ 테지만, 현실 속에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음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몰락해가고 있는 계층의 몰락해가고 있는 대표자’가 몰락하는 것이 마땅한 현실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비현실적인 반전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더 고착화하는 비극인 것이다. 여왕의 사면은 희곡 안에서도, 밖에서도 우리의 정답이 되지 못한다. 매키 매서라는 죄 많은 인간이 계속 살아있는 런던은 그의 생사여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돈의 질서에 의하여 또 무수한 범죄들로 가득찰 것이다. 심지어 여왕의 사면 따위 기대할 수 없는 무력한 현실은 ‘비명이 울려 퍼지는 이 골짜기’ 속의 하류 인생들을 차갑게 얼려 버릴 것이다. 결국 그 무엇도 해법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극은 철저한 비극이다. 등장 인물 뿐만이 아니라 읽는 독자마저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가 무력하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비극인 것이다.


 『서 푼짜리 오페라』를 읽고 난 후 마치 강아지의 찢긴 시체와 다리 없이 웅크린 걸인의 형상과도 같이 독자의 의식을 집요히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괴로움의 실체는 ‘고난이 가장 클 때 도움이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우리의 현실과, 그에 대한 우리 모두의 무력감이 뒤섞인 비극 그 자체였다.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소외된 것만 같은 거지들의 세상에서도 물질과 예속의 질서는 다시금 무한히 반복되고, 여전히 사랑과 우정과 신뢰의 일체는 배신, 불신, 기만의 상처로 얼룩져있다. 가끔씩 세상이 아름답게 빛나는 듯한 풍경 뒤에는 또 어느 이름 모를 이의 차갑게 얼어붙은 어둠이 눈물방울처럼 서려있을 것인지. 어둠 속에 있어야 할 것이 빛 속에 있을 때, 그 당황스럽고 불편한 의식의 교란을 헤집고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이 오페라를 향하여 던지는 서푼은, 그 무기력함 지우기 위해 지불한 값이 아닌, 도리어 우리의 무기력한 침묵이 현실에 지고 있는 빚에 대한 단 몇 푼의 이자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러한 빚은 도무지 청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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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2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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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노래

-토마스 만의 [토니어 크뢰거]를 읽고



문 선 경



저 눈부신 태양 한 움큼을

간밤에 오롯이 붙잡아 두었느냐

나 다가서면 쉬이 녹을 듯

너는 황홀한 금빛의 결정

이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은

네게 닿으려하는 동경어린 몸짓.



아물지 못한 자연의 상처를 따라

저주스럽게 퍼덕이는 두 장의 날개

등에 낙인찍힌 자의 욱신거림이란

죽는 순간까지 지속될 나의 숙명

길 잃고 헤매는 꿀벌의 사랑은

날개 없는 너를 향한 우울한 질투.

 


자연의 표면을 응시하는 네 두 눈은

어찌 이리도 평온하고 단정하게 빛나는지!

스스로 풍성한 빛에 둘러싸인 너는

빛 떠난 자리의 서늘함을 정녕 모르도다

가슴을 짓누르듯 타오르는 이 사랑은

무지(無知)한 눈동자를 향한 극히 적은 경멸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빛나는 너,

생동하는 몸짓이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나의 냉혹한 열광에 온기를 더하는 너를 위하여

저 빛에 걸맞는 질서와 형상을 바치리라

마음으로 온전히 맹세한 이 사랑은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






 

소설 1장의 끝과 9장의 끝은 동일한 감정의 요소가 반복되는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동경과, 우울한 질투, 경멸, 그리고 행복감.

세월이 흐르고 포용할 수 있는 세계의 폭이 넓어져도

끝내 변하지 않는 이 네 가지 감정이 예술가의 숙명이 아닌가 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꽃을 향한 꿀벌의 사랑을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썼습니다.

혹시라도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을 읽으셨던 분들은 [토니오 크뢰거]를 읽어주세요.

이 단편은 저의 운문으로는 표현하지 못할 만큼 훨씬 더 아름답고, 고요한 산문입니다.

영혼을 덜어서 써낸 것만 같은 문장들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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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형형 2009/11/18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번째 이미지가 왜 안뜨지;;

    꾸준히 뭔가 문학작품을 읽는구나.. 심히 부럽....

  2. 2009/11/26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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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압락사스이길 거부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문 선 경

 

진멸(盡滅)과 멸절(滅絶)의 뜻을 아는가. 그것은 호흡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을 먼지와 같이 죄다 멸망시켜버리는 환란의 언어이다. 그것은 바람 한줌에 몸을 싣는 하루살이의 생(生)마저도 발붙일 수 없게 만드는, 철저히 생명으로부터 소외된 폐허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무리를 향하여 ‘진멸하리라’, ‘멸절시키리라’고 말하는 무력자의 얼굴은 얼마나 섬뜩한가. 저 참혹한 죽음을 기꺼이 용인하는 잔인성, 악마 중에서도 가장 악마적인 잔인함이 깃든 시선과 나는, 모든 이들이 가장 신성하다고 드높여마지않는 책 속에서 마주쳤다, 바로 성경 속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중략)........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스바냐 2장 2-6절)

 

데미안을 읽기도 전이었던 중학생 시절, 언제나 자비롭고 온유하게만 생각해왔던 나의 신은 내게 이렇게 악마보다도 소름끼치는 진노의 형상을 내비쳤다.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온 땅을 불과 죽음으로 삼켜버리겠다니! 이 무시무시한 ‘여호와의 질투’는 나로 하여금 신이란 오로지 선(善)함만을 대변하는 수호자가 아닌, 선과 악을 모조리 그 안에 품고 있으되 그 중 선한 것을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권하는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즉, 신이 완전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선과 악을 모두 함께 주관하고 심판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데미안의 말을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데미안에게 기존의 신이란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도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으로만 점철되어 있기에 지극히 세상의 반쪽만을 대변하는 불완전한 신이었다. 따라서 데미안은 자연의 질서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품고자 하는 개성 있는 인간은 자연에 의해 내던져진 돌덩이와 같으며, 선과 악이 이분화된 <두 세계>를 용기 있게 초월하는 것으로써 자아를 실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걷는 ‘표식 있는 자’들은 삶의 매 순간을 고독하게 투쟁해야하는데, 이 투쟁을 거친 인간만이 압락사스라는, 기독교의 신과는 구별되게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신으로 거듭난다. 다시 말하면 이 압락사스는 외롭고 치열한 투쟁의 결과로써 인간 개개인이 완전한 신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상징적 지표이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의 신이 악마적인 것까지도 포괄하는 존재라면? 자신을 경배하는 인간의 앞길을 선히 예비하되 다른 우상 숭배를 향하여서는 저리도 악하게 분노하고 질투하는 존재, 나아가 선과 악 모두를 엄중히 가늠하는 심판자가 다름 아닌 여호와라면? 그리하여 선과 악으로 미숙하게 이분화 되었던 <두 세계>는 결국 완전한 신 안에서 이미 통합되어 있고, 인간이 더 이상 저 홀로 내던져진 돌덩이가 아니라, 신이 붙잡은 줄에 묶인 공이 되어, 흔들리되 결코 고독하지는 않은 구원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과연 인간의 자아실현이 그렇게 마냥 어두컴컴한 고독 속에 매 순간 투쟁만을 거듭해야할 만큼 비극적이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스스로를 위해 침묵하는 압락사스를 향해, 그 자신이 압락사스가 되기 위하여 그토록 험하고 외로운 여정을 몸소 걸어야 할 여분의 당위가 우리 모두에게 ‘공평히’ 존재한단 말인가?

 

설령 헤세가 제시한 자아실현의 길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그 길은 결코 평등할 수가 없다. 고독한 투쟁은 애초에 ‘표식 있는 자들’이 전유물이 되며 또한 그들 모두가 동일하게 구도자의 길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헤세 자신이 데미안 서문에 밝힌 것처럼 인간이 이르려는 자기 구원이란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마는 길이다. 왜?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홀로 짊어지기에 너무나도 힘겹고 가혹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거역한다는, 비범한 것을 원한다는 남모르는 만족’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다. 매 순간마다 한 인간이 자신의 근거지를 남기지 않고 그 모두를 싸워 투쟁하고 깨뜨려야 하는 알껍질로 받아들이는 삶이란 오로지 초인만이 실현할 수 있는 보편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 세계가 60억의 압락사스로 세워지는 순간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며, 설령 그 중 불과 천명의 압락사스가 세워진다고 해도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한명의 초인이 탄생할 지라도 그것이 생명의 에너지가 아닌 죽음의 전쟁과 연결될 수 있음을 우리의 끊임없는 역사가, 제 2차 세계대전이 여실히 증명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순간이 소설 마지막에 살육과 말살의 전쟁과 겹쳐지는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물론 헤세가 강조하려던 것은 인간 저마다 새로 태어나려하는 강력한 삶의 에너지였겠지만, 저마다의 전쟁 같은 삶 속에서 탄생하는 초인은 전체주의와 엘리트적인 이데올로기 및 그에 파생되는 무수한 몰개성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

 

싱클레어는 작품 초반, 그를 강하게 밀어내려던 거부감으로부터 멀어져 결국 그를 받아들이고 그를 완전히 닮아있게 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아의 삶을 추구하려는 한 젊음의 통과의례’라고 한다. 그러나 내게는 이것이 젊음에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를 통과하며 결국 죽음을 맞아들이는 의례로 여겨졌다. 매 순간이 저 어두컴컴한 고독 속에 고통스럽게 깨뜨려야할 알껍질로 남겨진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그의 압락사스는 단지 이 모두를 상징하는 하나의 지표일 뿐 죽음 속에 내몰린 인간의 고통을 함께 짊어져주지 않는다. 그 불확실한 고통을 감수하는 것, 나아가 그 고통이 한낱 개구리의 삶으로 그치거나, 혹은 내가 마침내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도마뱀으로 그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라면 나는 데미안을 닮지 않겠다, 압락사스가 되지 않겠다. ‘종교란 인간의 초인적인 가능성을 말살하고 신의 이름 아래 모든 인간존재를 하향평준화하는 하는 것’이라던 누군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인의 가능성을 현실로 부정한다. 나는 나의 고독을 거두어가는 신 안에서 부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며 신을 닮아가겠다. 그와, 나의 심판자이자 아버지인 그와.


- 독일명작의 이해 수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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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헤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배척도 아니고 믿음의 강권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나는 
싱클레어가 읖조렸던 말처럼
내 속에서 온전히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못하고 겁없이 썼다

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려는 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낮아짐을 감사히 여기는지를
한번쯤은 솔직히 고백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 및 성경의 성역화에 대한 교수님의 염려는 잘 알고 있다
기독교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주님을 더 붙잡게 된다
내가 그 부정적인 시각을 깰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아집과 강권과 배척과 편협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그저 주님이 내게 주시는 감사함을 드러내는 삶 살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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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5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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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

-카프카 ‘변신’ 을 읽고



문 선 경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했다.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한결 더 단호했다. 시계탑의 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내내 이런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였다. 사위가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도 그는 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힘없이 떨어졌고 그의 콧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왔다.


 이것이 그레고르 잠자의 최후이다. 벌레가 된 자식의 모습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의 오열(嗚咽)로부터, 맨손 대신 헝겊으로 음식을 나르는 누이의 경멸(輕蔑)로부터, 그리고 자식을 향해 비정하게 사과를 내던지는 아버지의 살의(殺意)로부터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고립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던 자의 마지막은 자못 평화로웠다. 그레고리 잠자를 위하여 그토록 잔인한 서술들을 쉴 새 없는 쉼표 속에 무참히 덧붙였던 카프카는 왜 그의 죽음 앞에서 유독 마침표 하나하나에 고요한 적막을 묶어놓은 듯한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를 묵묵히 예비해 두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으로서 죽는가, 벌레로서 죽는가.’ 그것이 저 ‘평화로운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나의 첫 단추였다. 그의 육체가 비록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렸다고 할지라도, 그의 내면이 인간의 감정과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는다면 결국 그의 죽음은 인간다운 무게를 지닌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했다.’는 구절에 주목했다. 식구들에 대한 감동은 인간이 추억을 통해 품을 수 있는 따뜻한 감정이었고, 식구들에 대한 사랑은 그가 끝내 가족들의 폭력을 다 감내하고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존엄하게 지키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위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은 이 기이하도록 고요한 죽음에 어떻게든 인간적인 위엄을 결부시키려는 나의 시도를 곧이곧대로 거들어주지 않았다. 가족들을 향한 감동과 사랑 바로 뒤에 병치된 결연한 죽음의 의지는 인간의 위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장한 그 무엇이 서려있었다.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을 누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단호한 것으로 만드는 비극은 무엇인가. 그 비극은 다름 아닌 그레고르 잠자의 ‘벌레로서의 자각’에 있었다. 즉, 그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한 마리의 무가치한 벌레로서 죽어야 할 당위에 도달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삶은 마지막 순간 슬픈 깨달음을 얻기까지 ‘자신의 삶은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소설 초반부, 아직 주인공이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을 당시에 그의 대사를 보면 그는 이미 변신 이전부터 자신의 삶이 정말 제대로 된 삶인지 아닌지에 대한 갈등으로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슨 고된 직업을 나는 택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여행중이라니. 집에다 벌여놓은 본상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직업상의 긴장이 훨신 더 큰 데다가 그 밖에도 여행의 고달픔이 덧붙여진다. 기차의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적이고 나쁜 식사, 자꾸 바뀌는 바람에 결코 지속되지도, 결코 정들지도 못하는 인간관계 등. 마귀나 와서 다 쓸어가라지!


 흉측한 벌레로의 변신은 앞선 질문을 ‘나는 인간으로서 사는가, 벌레로서 사는가’의 갈등으로 보다 명확히 규정짓는 것이었다. 1장에서는 ‘목소리가 변한 것은 감기, 외판사원의 직업병의 전조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눈꼽만큼도 믿어 의심치 않았’을 정도로 스스로 벌레임을 완강히 부인하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외부의 사회적 질서를 상징하는 지배인으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의 육체가 정말 벌레로 변해버렸음을 최초로 인정하게 된다.


 2장에서는 벌레로서의 자아와 인간으로서의 자아간의 갈등이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인 가족을 통해 더욱 더 증폭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변해버린 식성과 활동반경에 놀라면서도 스스로를 벌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정신 때문에 괴로워한다. 점액질로 얼룩진 천장이 그 자체로서 벌레로서의 주인공을 보란듯이 증명하는 와중에도, 그는 인간으로서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구들을 방에서 비워버리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의 방을 말끔히 치워버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무참히 소거해가는 가족의 폭력으로 인해 그는 또 다시 자아 간의 싸움에서 거듭 패배한다.


 그리고 마침내 3장에 가서 벌레이기를 부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는 누이의 바이올린 소리가 인도하는 구원을 향하여 최후의 몸부림을 친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마치 그리워하던, 미지(未知)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는 누이동생한테까지 앞으로 밀고 나아가 누이의 치마를 당김으로써, 여기서는 그 누구도 자기처럼 연주를 들을만한 자격이 없으니 바이올린을 들고 자기 방으로 좀 들어와 달라는 암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누이가 들어오면 다시는 내보내지 않으리라, 적어도 자기가 살아있는 한은, 그의 끔찍스러운 모습이 처음으로 쓰임새 있게 될지니, 자기 방의 문이란 문께에 동시에 가 있다가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리라, 그러나 누이동생은 강요를 받아서는 안되고, 자유 의사로 그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누이를 부르려는 그의 격정적인 몸짓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마지막 의지의 발현이었다. 누이의 음악은 마치 벌레의 의식에 침잠해 있던 주인공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구원의 메시지와도 같았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공간에 열렬히 초대한다. 그러나 쓰임새 있는 단 하나의 존재 가치라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주인공의 시도는 그를 둘러싼 외부 세계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결국 그 자신을 더욱 더 철저히 벌레답게 인식하고 마는 결과를 낳는다. 이 마지막 시도의 실패는 결국 인간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스스로를 온전히 벌레로 자각하게 된 이후 그레고르 잠자에겐 더 이상 내면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자신이 이미 온전히 존재의 이유를 박탈당한, 실로 무가치한 벌레임이 너무도 자명해졌으므로. 따라서 그는 이제 인간으로서의 위엄이 아니라 벌레로서 철저히 이질적인 거리감을 두고 가족들에 대한 기억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더 이상 무엇 하나 기대하고 간절히 바랄 것 없이 모든 희망이 연소되어 사라져 버린 죽음은 참으로 고요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무겁고, 적막하고, 잔인하고, 서글픈 것이어서, 카프카는 모두에게 낯설지만은 않은 저 벌레 한 마리의 최후를 향하여 다른 어떤 부연 진술 없이 그저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만을 묵묵히 예비해 두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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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0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2. 2009/11/11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 문모양 2009/11/13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열씸히 읽어주었네 >_< 좋은 말들 고마워!

      음... 문학을 읽으면, 그리고 글을 쓰면 내 안의 감정적인 면들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 같애. 때로는 그게 너무 싫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으로부터 초연해지려고. 사람이 감정적인 순간도 있고 이성적인 순간도 있는 법이니까. 어느 하나 남김없이 나라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특정한 형용사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

      다시 한번 고마워~ 열심히 읽어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