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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9 [세계문학] 카프카 - 변신 (4)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

-카프카 ‘변신’ 을 읽고



문 선 경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했다.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한결 더 단호했다. 시계탑의 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내내 이런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였다. 사위가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도 그는 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힘없이 떨어졌고 그의 콧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왔다.


 이것이 그레고르 잠자의 최후이다. 벌레가 된 자식의 모습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의 오열(嗚咽)로부터, 맨손 대신 헝겊으로 음식을 나르는 누이의 경멸(輕蔑)로부터, 그리고 자식을 향해 비정하게 사과를 내던지는 아버지의 살의(殺意)로부터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고립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던 자의 마지막은 자못 평화로웠다. 그레고리 잠자를 위하여 그토록 잔인한 서술들을 쉴 새 없는 쉼표 속에 무참히 덧붙였던 카프카는 왜 그의 죽음 앞에서 유독 마침표 하나하나에 고요한 적막을 묶어놓은 듯한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를 묵묵히 예비해 두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으로서 죽는가, 벌레로서 죽는가.’ 그것이 저 ‘평화로운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나의 첫 단추였다. 그의 육체가 비록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렸다고 할지라도, 그의 내면이 인간의 감정과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는다면 결국 그의 죽음은 인간다운 무게를 지닌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했다.’는 구절에 주목했다. 식구들에 대한 감동은 인간이 추억을 통해 품을 수 있는 따뜻한 감정이었고, 식구들에 대한 사랑은 그가 끝내 가족들의 폭력을 다 감내하고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존엄하게 지키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위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은 이 기이하도록 고요한 죽음에 어떻게든 인간적인 위엄을 결부시키려는 나의 시도를 곧이곧대로 거들어주지 않았다. 가족들을 향한 감동과 사랑 바로 뒤에 병치된 결연한 죽음의 의지는 인간의 위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장한 그 무엇이 서려있었다.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을 누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단호한 것으로 만드는 비극은 무엇인가. 그 비극은 다름 아닌 그레고르 잠자의 ‘벌레로서의 자각’에 있었다. 즉, 그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한 마리의 무가치한 벌레로서 죽어야 할 당위에 도달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삶은 마지막 순간 슬픈 깨달음을 얻기까지 ‘자신의 삶은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소설 초반부, 아직 주인공이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을 당시에 그의 대사를 보면 그는 이미 변신 이전부터 자신의 삶이 정말 제대로 된 삶인지 아닌지에 대한 갈등으로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슨 고된 직업을 나는 택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여행중이라니. 집에다 벌여놓은 본상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직업상의 긴장이 훨신 더 큰 데다가 그 밖에도 여행의 고달픔이 덧붙여진다. 기차의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적이고 나쁜 식사, 자꾸 바뀌는 바람에 결코 지속되지도, 결코 정들지도 못하는 인간관계 등. 마귀나 와서 다 쓸어가라지!


 흉측한 벌레로의 변신은 앞선 질문을 ‘나는 인간으로서 사는가, 벌레로서 사는가’의 갈등으로 보다 명확히 규정짓는 것이었다. 1장에서는 ‘목소리가 변한 것은 감기, 외판사원의 직업병의 전조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눈꼽만큼도 믿어 의심치 않았’을 정도로 스스로 벌레임을 완강히 부인하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외부의 사회적 질서를 상징하는 지배인으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의 육체가 정말 벌레로 변해버렸음을 최초로 인정하게 된다.


 2장에서는 벌레로서의 자아와 인간으로서의 자아간의 갈등이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인 가족을 통해 더욱 더 증폭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변해버린 식성과 활동반경에 놀라면서도 스스로를 벌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정신 때문에 괴로워한다. 점액질로 얼룩진 천장이 그 자체로서 벌레로서의 주인공을 보란듯이 증명하는 와중에도, 그는 인간으로서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구들을 방에서 비워버리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의 방을 말끔히 치워버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무참히 소거해가는 가족의 폭력으로 인해 그는 또 다시 자아 간의 싸움에서 거듭 패배한다.


 그리고 마침내 3장에 가서 벌레이기를 부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는 누이의 바이올린 소리가 인도하는 구원을 향하여 최후의 몸부림을 친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마치 그리워하던, 미지(未知)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는 누이동생한테까지 앞으로 밀고 나아가 누이의 치마를 당김으로써, 여기서는 그 누구도 자기처럼 연주를 들을만한 자격이 없으니 바이올린을 들고 자기 방으로 좀 들어와 달라는 암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누이가 들어오면 다시는 내보내지 않으리라, 적어도 자기가 살아있는 한은, 그의 끔찍스러운 모습이 처음으로 쓰임새 있게 될지니, 자기 방의 문이란 문께에 동시에 가 있다가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리라, 그러나 누이동생은 강요를 받아서는 안되고, 자유 의사로 그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누이를 부르려는 그의 격정적인 몸짓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마지막 의지의 발현이었다. 누이의 음악은 마치 벌레의 의식에 침잠해 있던 주인공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구원의 메시지와도 같았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공간에 열렬히 초대한다. 그러나 쓰임새 있는 단 하나의 존재 가치라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주인공의 시도는 그를 둘러싼 외부 세계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결국 그 자신을 더욱 더 철저히 벌레답게 인식하고 마는 결과를 낳는다. 이 마지막 시도의 실패는 결국 인간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스스로를 온전히 벌레로 자각하게 된 이후 그레고르 잠자에겐 더 이상 내면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자신이 이미 온전히 존재의 이유를 박탈당한, 실로 무가치한 벌레임이 너무도 자명해졌으므로. 따라서 그는 이제 인간으로서의 위엄이 아니라 벌레로서 철저히 이질적인 거리감을 두고 가족들에 대한 기억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더 이상 무엇 하나 기대하고 간절히 바랄 것 없이 모든 희망이 연소되어 사라져 버린 죽음은 참으로 고요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무겁고, 적막하고, 잔인하고, 서글픈 것이어서, 카프카는 모두에게 낯설지만은 않은 저 벌레 한 마리의 최후를 향하여 다른 어떤 부연 진술 없이 그저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만을 묵묵히 예비해 두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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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0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2. 2009/11/11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 문모양 2009/11/13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열씸히 읽어주었네 >_< 좋은 말들 고마워!

      음... 문학을 읽으면, 그리고 글을 쓰면 내 안의 감정적인 면들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 같애. 때로는 그게 너무 싫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으로부터 초연해지려고. 사람이 감정적인 순간도 있고 이성적인 순간도 있는 법이니까. 어느 하나 남김없이 나라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특정한 형용사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

      다시 한번 고마워~ 열심히 읽어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