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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1 [셰계문학] 헤르만 헤세 - 데미안 (2)

 

 


나는 압락사스이길 거부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문 선 경

 

진멸(盡滅)과 멸절(滅絶)의 뜻을 아는가. 그것은 호흡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을 먼지와 같이 죄다 멸망시켜버리는 환란의 언어이다. 그것은 바람 한줌에 몸을 싣는 하루살이의 생(生)마저도 발붙일 수 없게 만드는, 철저히 생명으로부터 소외된 폐허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무리를 향하여 ‘진멸하리라’, ‘멸절시키리라’고 말하는 무력자의 얼굴은 얼마나 섬뜩한가. 저 참혹한 죽음을 기꺼이 용인하는 잔인성, 악마 중에서도 가장 악마적인 잔인함이 깃든 시선과 나는, 모든 이들이 가장 신성하다고 드높여마지않는 책 속에서 마주쳤다, 바로 성경 속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중략)........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스바냐 2장 2-6절)

 

데미안을 읽기도 전이었던 중학생 시절, 언제나 자비롭고 온유하게만 생각해왔던 나의 신은 내게 이렇게 악마보다도 소름끼치는 진노의 형상을 내비쳤다.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온 땅을 불과 죽음으로 삼켜버리겠다니! 이 무시무시한 ‘여호와의 질투’는 나로 하여금 신이란 오로지 선(善)함만을 대변하는 수호자가 아닌, 선과 악을 모조리 그 안에 품고 있으되 그 중 선한 것을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권하는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즉, 신이 완전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선과 악을 모두 함께 주관하고 심판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데미안의 말을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데미안에게 기존의 신이란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도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으로만 점철되어 있기에 지극히 세상의 반쪽만을 대변하는 불완전한 신이었다. 따라서 데미안은 자연의 질서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품고자 하는 개성 있는 인간은 자연에 의해 내던져진 돌덩이와 같으며, 선과 악이 이분화된 <두 세계>를 용기 있게 초월하는 것으로써 자아를 실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걷는 ‘표식 있는 자’들은 삶의 매 순간을 고독하게 투쟁해야하는데, 이 투쟁을 거친 인간만이 압락사스라는, 기독교의 신과는 구별되게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신으로 거듭난다. 다시 말하면 이 압락사스는 외롭고 치열한 투쟁의 결과로써 인간 개개인이 완전한 신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상징적 지표이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의 신이 악마적인 것까지도 포괄하는 존재라면? 자신을 경배하는 인간의 앞길을 선히 예비하되 다른 우상 숭배를 향하여서는 저리도 악하게 분노하고 질투하는 존재, 나아가 선과 악 모두를 엄중히 가늠하는 심판자가 다름 아닌 여호와라면? 그리하여 선과 악으로 미숙하게 이분화 되었던 <두 세계>는 결국 완전한 신 안에서 이미 통합되어 있고, 인간이 더 이상 저 홀로 내던져진 돌덩이가 아니라, 신이 붙잡은 줄에 묶인 공이 되어, 흔들리되 결코 고독하지는 않은 구원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과연 인간의 자아실현이 그렇게 마냥 어두컴컴한 고독 속에 매 순간 투쟁만을 거듭해야할 만큼 비극적이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스스로를 위해 침묵하는 압락사스를 향해, 그 자신이 압락사스가 되기 위하여 그토록 험하고 외로운 여정을 몸소 걸어야 할 여분의 당위가 우리 모두에게 ‘공평히’ 존재한단 말인가?

 

설령 헤세가 제시한 자아실현의 길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그 길은 결코 평등할 수가 없다. 고독한 투쟁은 애초에 ‘표식 있는 자들’이 전유물이 되며 또한 그들 모두가 동일하게 구도자의 길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헤세 자신이 데미안 서문에 밝힌 것처럼 인간이 이르려는 자기 구원이란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마는 길이다. 왜?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홀로 짊어지기에 너무나도 힘겹고 가혹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거역한다는, 비범한 것을 원한다는 남모르는 만족’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다. 매 순간마다 한 인간이 자신의 근거지를 남기지 않고 그 모두를 싸워 투쟁하고 깨뜨려야 하는 알껍질로 받아들이는 삶이란 오로지 초인만이 실현할 수 있는 보편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 세계가 60억의 압락사스로 세워지는 순간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며, 설령 그 중 불과 천명의 압락사스가 세워진다고 해도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한명의 초인이 탄생할 지라도 그것이 생명의 에너지가 아닌 죽음의 전쟁과 연결될 수 있음을 우리의 끊임없는 역사가, 제 2차 세계대전이 여실히 증명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순간이 소설 마지막에 살육과 말살의 전쟁과 겹쳐지는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물론 헤세가 강조하려던 것은 인간 저마다 새로 태어나려하는 강력한 삶의 에너지였겠지만, 저마다의 전쟁 같은 삶 속에서 탄생하는 초인은 전체주의와 엘리트적인 이데올로기 및 그에 파생되는 무수한 몰개성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

 

싱클레어는 작품 초반, 그를 강하게 밀어내려던 거부감으로부터 멀어져 결국 그를 받아들이고 그를 완전히 닮아있게 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아의 삶을 추구하려는 한 젊음의 통과의례’라고 한다. 그러나 내게는 이것이 젊음에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를 통과하며 결국 죽음을 맞아들이는 의례로 여겨졌다. 매 순간이 저 어두컴컴한 고독 속에 고통스럽게 깨뜨려야할 알껍질로 남겨진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그의 압락사스는 단지 이 모두를 상징하는 하나의 지표일 뿐 죽음 속에 내몰린 인간의 고통을 함께 짊어져주지 않는다. 그 불확실한 고통을 감수하는 것, 나아가 그 고통이 한낱 개구리의 삶으로 그치거나, 혹은 내가 마침내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도마뱀으로 그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라면 나는 데미안을 닮지 않겠다, 압락사스가 되지 않겠다. ‘종교란 인간의 초인적인 가능성을 말살하고 신의 이름 아래 모든 인간존재를 하향평준화하는 하는 것’이라던 누군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인의 가능성을 현실로 부정한다. 나는 나의 고독을 거두어가는 신 안에서 부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며 신을 닮아가겠다. 그와, 나의 심판자이자 아버지인 그와.


- 독일명작의 이해 수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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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헤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배척도 아니고 믿음의 강권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나는 
싱클레어가 읖조렸던 말처럼
내 속에서 온전히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못하고 겁없이 썼다

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려는 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낮아짐을 감사히 여기는지를
한번쯤은 솔직히 고백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 및 성경의 성역화에 대한 교수님의 염려는 잘 알고 있다
기독교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주님을 더 붙잡게 된다
내가 그 부정적인 시각을 깰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아집과 강권과 배척과 편협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그저 주님이 내게 주시는 감사함을 드러내는 삶 살게 해달라고.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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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5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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