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가
- 영화 ‘글래디에이터’
영웅[英雄]
[명사]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
이것이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영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이다. 만약 사전의 이와 같은 해석이 ‘영웅’의 의미를 한 치의 가감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충실히 구현한 것이었다면 나는 이 단어를 보며 모종의 위화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언어의 세계에서 사전은 단순히 길을 찾기 위한 핵심정보만이 나열된 지도일 뿐이다. ‘영웅’이라는 단어에는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감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힘이 아주 센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장군’이나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영재’라는 말로 대체될 수 없는 심리적인 거리감이다. 그리고 그 거리감은 일상에 부재하는 가치를 특정 존재에 투영시키려는 다수의 의지를 증폭시키며 ‘영웅’이라는 단어를 암묵적인 동의 아래 미화하고 격상시킨다. 자기 자신을 지칭하기 위한 말이기 보다 타인의 목소리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는 이 단어의 근원적인 속성이 바로 영화 ‘글래디에이터’ 감상 이후부터 지속되어온 내 형체 없는 위화감의 원인이었다.
영화 속에는 ‘막시무스’라는 본명보다도 ‘영웅’이라는 존재로 군중에게 보다 특별히 각인된 인물이 존재한다. 로마의 사람들은 그를 두 가지 의미에서 영웅이라 칭송한다. 하나는 싸움에서의 승리를 쟁취하는 전사적 의미의 영웅이며, 다른 하나는 황제의 폭정을 종결짓고 공화정을 실현시킬 정치적 의미의 영웅이다. 이 두 가지 시선은 막시무스를 먼발치에서 응시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저마다의 이상과 욕구를 그에게 투영시키며 이후에 그가 보여줄 행동들에 대한 기대감을 보상받고자 한다. 그리고 검투사라는 막시무스의 신분은 그를 그러한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도록 속박한다. 로마의 모순이 집약된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영웅을 통해 충족되고자 하는 서로 다른 욕구, 그리고 막시무스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복수의식의 공존은 이 영화의 결말을 단순히 ‘영웅의 장렬한 전사’로 끝맺을 수 없는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로마를 흥분시키는 것은 원로원이 아니라 원형경기장의 흙먼지야.”
“끝으로 당신, 절대로 죽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콜로세움은 피비린내 나는 검투 시합을 통해 검투사, 로마 백성, 그리고 황제의 서로 다른 욕구가 뒤엉킨 공간이다. 검투사가 생존을 향한 원초적인 욕구를 통해 목숨을 건 시합에서 전력을 다해 싸우면, 시민은 검투사의 생존의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써 인간 본연에 내재된 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황제는 이와 같은 욕구를 모두 흡수하며 최종적으로 강력한 제국지배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러한 콜로세움의 계층적 욕구 구조 내에서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최하층의 검투사 막시무스가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황제 코모두스의 생존욕구를 위협한다는 사실은 욕구의 층위를 전복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백성은 막시무스가 적을 향해 휘두르는 칼끝에 몇 배나 더 열광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막시무스의 존재는 눈앞의 적만이 아니라 결코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황제의 권위에마저 대항하는 ‘전사적 영웅’으로 각인되었다.
검투사의 신분인 막시무스가 백성들에게 전사적 의미의 영웅으로 각인된 이상 그의 칼부림은 더 이상 전투에서의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된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현실에서 결코 실현시킬 수 없는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를 막시무스의 몸짓 하나하나에 투영시키며 열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전투는 시합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극적이어야만 한다. 즉, 검술을 통해 전투 도중의 생존뿐만이 아니라 전투 이후의 생존을 책임질 관중의 공감까지 함께 획득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는 것이다. 백성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이 점차 헤어 나올 수 없는 속박과도 같아질 때 백성은 황제 이상으로 막시무스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 된다. 결국 시합이 계속 될수록 막시무스라는 영웅은 백성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도 철저히 고립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콜로세움 밖에선 공화정을 둘러싼 로마 지배계급 내의 모순이 펼쳐진다. 코모두스 황제의 폭정은 원로원의 의원들을 자극하며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모순을 종식시킬 새로운 ‘정치적 영웅’의 탄생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 여기서 공주의 중개로 막시무스와 원로원 대표의원 그라쿠스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지는데, 그라쿠스 의원이 막시무스를 로마 밖으로 빼주는 대신, 막시무스가 병사 5천을 데리고 쿠테타를 일으켜 코모두스를 처단함으로써 공화정을 부활시키자는 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막시무스를 현실의 유일한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서로의 생명을 하나의 것으로 연결하는 듯한 그라쿠스의 다음과 같은 대사에도 반영된다. “끝으로 당신, 절대로 죽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그러나 이 대사가 압축하고 있는 원로원과 막시무스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동지애와는 별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막시무스의 말이라면 죽음이라도 각오할 수 있는 그의 병사들과는 달리 그라쿠스는 막시무스에게 ‘절대 죽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둘의 관계가 공화정을 지지한다는 동일한 입장을 취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위태로운 동맹임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라쿠스가 막시무스에게 쿠테타 이후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거듭 약조 받는 장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즉, 정치적 영웅으로서의 막시무스는 정치적 필요성을 느끼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막시무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 쿠테타에 성공해야하는 또 하나의 부담을 떠안게 된다. 결국 그는 쿠데타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이전부터 이미 철저히 고립되어 있던 것이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스무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의 장군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충복이었다.
타죽은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살아서 안 되면 죽어서라도!”
막시무스를 전사적 영웅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정치적 영웅으로 바라보는 시각 중 어떤 것도 그에게 순수한 의미의 환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 이들 중 누군가는 그에게 호흡마저 멈출 정도의 극적인 싸움을 요구했고, 누군가는 그에게 영광스런 쿠테타의 한 장면만을 장식하고 퇴장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뛰어난 무예나 정치에 때묻지 않은 심성, 선왕에의 충성심이 막시무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면 그는 로마로부터 훨씬 더 빠르게 잊혀 졌을 것이다.
그런 그가 영웅이라는 이름의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은 바로 황제를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황제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막시무스를 영웅으로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막시무스 또한 황제 앞에 영웅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다만 태워 죽인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복수심만 온전히 칼끝에 담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순간만큼은 로마도, 콜로세움도, 검투사라는 신분도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영웅이 아닌 막시무스라는 이름의 인간을 지금껏 지탱시켜온 것은, 모든 것을 잃고 숨 쉬는 몸뚱아리 하나만이 남았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가장 근본적인 힘은 다름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분노와 복수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인간적인 복수심에 타올랐던 막시무스를 기억하는 관중은 없다. 관중은 또다시 철인 같은 영웅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한다. 선왕의 딸은 막시무스의 죽음 앞에서 ‘영웅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라쿠스가 나와 병정들로 하여금 막시무스의 시신을 후송하게 한다. 화면은 전환되고 흑인 검투사가 막시무스와 나누었던 말들을 되뇌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것으로 끝일까. 정말로 그들이 기념하는 영웅의 죽음은 헛되이 되지 않은 것일까. 그의 죽음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애초부터 ‘영웅’이라는 명칭이 막시무스 자신을 위한 단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사적 영웅과 정치적 영웅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로마의 요구 하에서, 막시무스는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위대한 만큼 쓸쓸하고 고독해야만 했다. 영웅의 무게감으로부터 탈각된 지극히 인간적이었던 순간도 그에게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죽음이후 그는 관중들과의 거리감이 불식되지 못한 콜로세움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되돌아와 죽음을 맞이했으며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인 감정보다 영웅적인 행위를 더욱 아름답게 기릴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지극히 인위적이어서 위화감을 남긴다.
‘영웅’은 신을 부르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 영화는 ‘한 인간이 영웅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부당하게 소비되고 착취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편의 생생한 기록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의 결말을 단순히 ‘영웅의 장렬한 전사’로 끝맺을 수 없는 이유이면서도, 콜로세움 및 로마에서 욕망의 대리자를 찾아 열광하던 무리와 함께 서있는 것이 혹시 나의 모습은 아니었는지를 반성하도록 만드는 거울과도 같았다. 나 또한 영웅의 신화에 사로잡혀 현실의 누군가를 철저히 소비하고 착취하는 흐름에 편승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하게 된 것이다.
물론 현실의 영웅이 막시무스와 다른 점은 영웅으로 칭송받는 존재가 스스로 그 영광에 도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타인의 욕구를 감당할 능력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그 욕구를 대리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얻는 영웅은 결코 ‘소비’ 및 ‘착취’와 같은 불결한 언어로 더럽혀지지 않을 것 같은 믿음을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웅’은 신을 부르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영웅은 신격화 될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이다. 영웅은 시간적이고 물리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언젠가는 기쁨과 성취감이라는 성격으로 수용했던 감정을 부담과 무게로 받아들일 날을 맞이해야만 한다. 즉, 영웅의 내적 역량 및 외부의 욕망 모두 가변적이기 때문에 영웅의 지위 또한 끝끝내 영원성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영웅은 타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소모되고, 그렇기에 끝내 소외당하는 운명에 얽매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스스로를 추앙하는 이에게조차 비극적인 거리감을 담보하며 고립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이름, 그것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비밀댓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