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포사]를 보기 전에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수업이 끝나면 눈시울을 적시는 몇몇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내가 그랬다.
간만에 마지막 장면이 클라이막스인 영화를 제대로 본 것 같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잔잔하고 소소한, 아름다운 영상들이
전부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과연 ‘나비의 혀’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았다. 나비에게 혀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꿀을 마셔야 하는 순간에 펼쳐지는 빨대로서 나비의 생존에 꼭 필요한 신체적 도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비를 이야기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혀’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나비를 떠올릴 때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속성은 바로 날개이다. 하늘하늘 바람결을 따라 자유롭게 펼치는 나비의 날개야말로 나비를 가장 나비답게 만드는 속성이리라. (그래서 영화 속에서도 그레고리오 선생은 나비를 잡을 때 ‘날개를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비의 부수적인 속성이 마치 나비의 전부인 것처럼 확대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부수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광기가 나비의 날개를 꺾는 순간도 있다. 그것이 영화 [마리포사]에 구현된 스페인 내전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나비가 빨아들이는 꿀의 차이처럼, 한 인물의 사고와 인생의 경로를 구분짓는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전부일까? 인간으로서 나이를 먹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사랑과 우정의 감정 모두를 치환해버릴 만큼 그것이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요소일까? 영화에 할애된 대부분의 시간은 나비의 날개와 같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삶의 자취와 감정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차분히 그려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영화는, 나비의 혀와도 같은 이데올로기의 차이에 대한 광기와 집착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모든 기억을 산산조각 내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마지막 장면, 순수한 눈동자가 내뱉는 순수한 언어와 어울리지 않는 모순된 상황을 통해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영화 내내 감독이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펼쳐내는 감미로운 영상들을 모두 잊고 마지막 장면에만 주목하는 것은 나비의 날개짓이 아닌 나비의 혀에만 집착하는 비극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감독은 영화 내내 흐르던 아름다운 음악과 영상들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스명이 수업 덕분에 간만에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아름답고도 슬픈 영화였다.


p.s.  순수한 눈동자의 아이는 스페인 내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타인에게 돌을 던지는 가해자가 된다.
       더욱 슬픈 것은 자신의 던지는 돌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이는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몬초가 돌을 던질때 내뱉는 '틸로노린코'는 사랑하는 암컷에게 꽃을 바치는 새의 이름(선생님이 알려준 것)이다.
       어쩌면 주인공 몬초는 사랑하는 그레고리오 선생을 향해 던지는 돌에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 것일지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구호를 내뱉는 몬초,
       그리고 그 몬초를 바라보는 그레고리오 선생의 처량한 시선의 교차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눈시울을 젖게 한다.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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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1 0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Let me in ; 시린 순수

movie 2008/11/20 21:08


Let me In 에 대한 단상


1. 엔딩 크레딧을 뒤로하고 나올 때 기분이란 마치 눈송이를 손에 쥐고 나온 느낌.
    2008년 접한 모든 영화들 중 가장 완벽한 눈의 결정. 

2. 온몸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 이보다도 격한 사랑의 표현을 당분간 영상에서 발견할 수 없을지도.

3. 잔인한 세월과 함께 염산이 눌러붙은 얼굴. 노년의 하칸(보호자)에게서 느끼는 비련한 순수.  

4. 영화의 디테일이 보여주는 정교함은 가히 이 이상의 완벽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 
   두 소년소녀가 만났던 정글짐, 
   감정의 첫 매개물인 퍼즐, 
   이엘리를 위해 칼을 집는 오스칼, 
   재회를 위한 수영장씬... 
   대안의 모색을 불경스럽게 만드는 치밀한 구성.

5. 순수라는 단어에 손을 대면 무척이나 시릴 것만 같은.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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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승빈이 2008/11/23 0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완전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본 거 같은 ㅋㅋ

    난 두 가지의 사랑을 대비해서 봤는데 ㅠㅋ

    이엘리한테 물려서 뱀파이어가 된 부인이랑 그 남편
    이엘리하고 오스칼
    이엘리하고 오스칼의 사랑은 더 나아가서 노년의 아저씨와 이엘리의 사랑으로 확대시켜서 볼 수도 있을거 같았는데,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순수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역시 경험 부족인가 ㅋㅋㅋ

    분명 노년의 아저씨는 옛날에는 이엘리와 오스칼의 관계처럼 이엘리와 사랑하는 사이였을거라 생각해. 마지막에 그런 암시가 나오기도 했지만 처음에 이엘리가 이사왔을 때 차 속에서 이엘리를 바라보던 눈빛이 사랑하는 눈빛이었거든. 난 전혀 내용을 모른 상태에서 와서 로리타 변태물인줄 알았다는 -_-;;;;

    이엘리를 위해서 계속 살인을 하고 결국엔 자기의 얼굴에 염산을 붓고 이엘리에게 목숨을 빼앗기는게, 사랑이었을까? 뭐랄까 그 노년의 남자에겐 사랑이 남아있었던 것도 같지만 이엘리한텐 없었던거 같애.

    전반적으로 난 노년의 아저씨와 이엘리의 관계를 좀 중점적으로 본거 같아. 그게 오스칼와 이엘리의 관계의 마지막일거란 생각도 들었고.~

    내 감상은 요정도 ㅠ ㅋ

    그날 빨리가서 넘넘 미안했슈 ㅠ

  2. 滿月 2008/11/24 0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와도 조금 미묘하게 다른 감상이에요 ㅎㅎ
    제 감상은 따로 올릴게요 + 트랙백 달았어요! 옷홍
    승빈양 같이 영화 얘기 못해서 아쉬웠어요

  3. Sola Fides 2008/11/28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영화 볼라고 엄청 찾아다녔는데 아직 못 찾았어.
    스웨덴에서 현재 상영하고 있다는 데 여기서 보면 무려 "스웨덴어"로 ...ㅠㅠ
    그래서 일단 보류중

  4. 사뿐 2008/12/04 0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엉 나 이거 너무 보고싶은데ㅠㅠㅠㅠㅠ
    근처에서는 한 군데도 안 하는 거 잇지 대체 어디서 본겨
    내리기 전에 얼른 봐야하는딩 엉엉

    • 문모양 2008/12/10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의 시기로 미루어볼때 사뿐냥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당;; 개봉한 영화관도 별로 없고, 관객수도 많지 않아서 금방 내렸을거야 아마 ㅠ 이 영화 진짜 음향에 신경 많이 써서 영화관에서 귀 곤두세우고 봐야 제맛인데 ㅠ 내가 더 안타깝당.. 나중에라도 다운받아서 꼭 보길! (아아아 오스칼 늙으면 안돼애애애애애애....엉엉)

  5. 사뿐 2008/12/21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봤음............(자랑자랑자랑자랑자랑♡)
    몹시 좋았다,

  6. 강지님 2009/10/04 0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랑은 좀 다르게 봤네ㅎㅎ 내겐 순수와 사랑으로 요약되기엔 고통스러운 성장통 같은 영화였어 ㅎㅎㅎ 어제서야 보고 오늘 블로그에 평썼다 ㅋㅋㅋ

    • 문모양 2009/10/05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영화는 손 대면 금방 녹아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순수의 이미지랄까... 눈의 결정으로 비유한 건 그런 의미였어 ^^ 다시 보고 싶다, 아니 다시 봐야겠다 ㅋㅋㅋ

A Vicious Innocence

-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를 만나다

자신을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라 부르는 살리에리에 대한 관객의 공감은, 그 대사의 표면적 의미 그대로에 대한 공감은 분명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범’이라는 단어가 ‘평균치에 근접한 다수의 집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그것이 타인에 대한 평가로 사용되었을 때뿐이지요. 스스로를 정의내리기 위한 ‘평범’은 이미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열등감에 의해 본래의 의미가 주관적으로 변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살리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살리에리를 결코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노력파'라는 표현도 사실 살리에리를 온전히 표현하기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영화를 관통하는 '모차르트의 재능', '살리에리의 신을 향한 분노', '살리에리의 죄책감'은 사실 모차르트에 비견될만한 살리에리의 재능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비극을 각기 다르게 표현한 것과 다름없지 않나요. 영화 속의 어느 누구도 살리에리만큼 모차르트에 가까울 수 없었어요. 이런 관점에서, ‘자신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라는 살리에리의 대사는 자신의 재능을 포함하여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기만한 망언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사실 대꾸할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저 대사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면, 그 까닭은 아마도 살리에리 자신의 입에서 저런 자기기만의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 그 자체에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 배경에는 우선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천재’라는 수식어를 예비할 뿐인 세상의 비정한 논리가 있고, 그 끝에는 이러한 논리에 가장 민감한 형태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살리에리라는 인물의 ‘순수함’이 있습니다. 제가 살리에리를 순수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신과 예술에 집착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말하자면, 그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밖에 인정할 수 없었던 인물 같아요. 일반적인 사람이 미(美)와 추(醜)의 스펙트럼 전체에서 다양한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 살리에리는 오직 극단적인 미의 정점에만 자신의 전부를 바쳐 그것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살리에리에게 신은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는 진심으로 ‘신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들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 같아요. 재능을 주시면 신을 찬양하겠다는 식의 ‘계약’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신을 향한 극단적인 나의 이 사랑을 표현하기에 합당한 음악을 만들 수 있게 해달라’는 열렬한 사랑의 기도 말이에요. 때문에 음악을 통해 신에게 무한히 다가가고자 하는 살리에리의 욕망은 신과 자신 사이에 모차르트라는 중간항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살리에리는 이를 ‘모차르트는 신을 위한 도구이며 자신은 마치 모차르트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즉, 신과 모차르트를 완전한 미의 영역에 남겨두고 추방당한 느낌이었겠지요. 그래서 저는 살리에리가 십자가를 태우는 장면이 스스로 신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극단적인 기준 아래에서 ‘더 이상 온전히 신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사실’, 곧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납득하게 되는 비극의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살리에리가 평생을 어마어마한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려야만 했던 것도, 뒤집어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순수했는가를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까요. 분명 그의 죄책감은 단순히 ‘살의에 대한 양심의 가책’ 정도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의 살의는 모차르트라는 개인을 넘어 그 뒤의 신, 그리고 완전한 아름다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미적 지향을 손쉽게 전환할 수 없는 순수한 사람임을 고려한다면, 그는 분명 모차르트의 죽음 이후로, 아니 십자가에 불을 지르던 그 순간부터 이미 정서적 방황을 심하게 앓고 있었을 것 같아요.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박탈감,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변함없는 동경, 질투... 이러한 정서적 방황은 그로 하여금 모차르트를 파멸시키도록 유도했지만, 결국 그 목적이 달성된 이후로도 그는 결코 신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어요. 허무함과 자기 환멸의 감정에 시달리는 살리에리를 보며 관객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라 자위하는 그의 대사에서 극단적인 순수로 발버둥치는 한 영혼을 이해하게 되고, 비로소 그 안타까움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개인적으로 살리에리는 지나칠 정도로 죄값을 많이 받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순수하다는 점, 모차르트를 닮았으나넘어설 수는 없었다는 점.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그렇게 인생을 아름다움과 평범의 영역에서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고, 죄책감이라는 감정의 상처에 평생을 얽매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오늘날, 가장 뛰어난 한 사람에게는 ‘천재’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예비해두고도, 막상 ‘천재에 준하는 능력을 갖추었으나 늘 천재의 뒤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는 적당한 명칭조차도 예비해두지 않은 세상의 비정한 논리 속에, 살리에리의 이름이 이 안타까운 존재를 대신하는 단어로 회자된다는 사실이 살리에리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죄값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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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1 0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글래디에이터 (Gladiator)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러셀 크로우, 와킨 피닉스, 코니 닐슨, 올리버 리드, 리차드 해리스
개봉 2000 미국, 154분
평점

그들은 왜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가

- 영화 ‘글래디에이터’

영웅[英雄]

[명사]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

이것이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영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이다. 만약 사전의 이와 같은 해석이 ‘영웅’의 의미를 한 치의 가감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충실히 구현한 것이었다면 나는 이 단어를 보며 모종의 위화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언어의 세계에서 사전은 단순히 길을 찾기 위한 핵심정보만이 나열된 지도일 뿐이다. ‘영웅’이라는 단어에는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감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힘이 아주 센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장군’이나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영재’라는 말로 대체될 수 없는 심리적인 거리감이다. 그리고 그 거리감은 일상에 부재하는 가치를 특정 존재에 투영시키려는 다수의 의지를 증폭시키며 ‘영웅’이라는 단어를 암묵적인 동의 아래 미화하고 격상시킨다. 자기 자신을 지칭하기 위한 말이기 보다 타인의 목소리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는 이 단어의 근원적인 속성이 바로 영화 ‘글래디에이터’ 감상 이후부터 지속되어온 내 형체 없는 위화감의 원인이었다.

영화 속에는 ‘막시무스’라는 본명보다도 ‘영웅’이라는 존재로 군중에게 보다 특별히 각인된 인물이 존재한다. 로마의 사람들은 그를 두 가지 의미에서 영웅이라 칭송한다. 하나는 싸움에서의 승리를 쟁취하는 전사적 의미의 영웅이며, 다른 하나는 황제의 폭정을 종결짓고 공화정을 실현시킬 정치적 의미의 영웅이다. 이 두 가지 시선은 막시무스를 먼발치에서 응시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저마다의 이상과 욕구를 그에게 투영시키며 이후에 그가 보여줄 행동들에 대한 기대감을 보상받고자 한다. 그리고 검투사라는 막시무스의 신분은 그를 그러한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도록 속박한다. 로마의 모순이 집약된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영웅을 통해 충족되고자 하는 서로 다른 욕구, 그리고 막시무스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복수의식의 공존은 이 영화의 결말을 단순히 ‘영웅의 장렬한 전사’로 끝맺을 수 없는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로마를 흥분시키는 것은 원로원이 아니라 원형경기장의 흙먼지야.”

“끝으로 당신, 절대로 죽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콜로세움은 피비린내 나는 검투 시합을 통해 검투사, 로마 백성, 그리고 황제의 서로 다른 욕구가 뒤엉킨 공간이다. 검투사가 생존을 향한 원초적인 욕구를 통해 목숨을 건 시합에서 전력을 다해 싸우면, 시민은 검투사의 생존의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써 인간 본연에 내재된 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황제는 이와 같은 욕구를 모두 흡수하며 최종적으로 강력한 제국지배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러한 콜로세움의 계층적 욕구 구조 내에서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최하층의 검투사 막시무스가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황제 코모두스의 생존욕구를 위협한다는 사실은 욕구의 층위를 전복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백성은 막시무스가 적을 향해 휘두르는 칼끝에 몇 배나 더 열광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막시무스의 존재는 눈앞의 적만이 아니라 결코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황제의 권위에마저 대항하는 ‘전사적 영웅’으로 각인되었다.

검투사의 신분인 막시무스가 백성들에게 전사적 의미의 영웅으로 각인된 이상 그의 칼부림은 더 이상 전투에서의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된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현실에서 결코 실현시킬 수 없는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를 막시무스의 몸짓 하나하나에 투영시키며 열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전투는 시합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극적이어야만 한다. 즉, 검술을 통해 전투 도중의 생존뿐만이 아니라 전투 이후의 생존을 책임질 관중의 공감까지 함께 획득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는 것이다. 백성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이 점차 헤어 나올 수 없는 속박과도 같아질 때 백성은 황제 이상으로 막시무스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 된다. 결국 시합이 계속 될수록 막시무스라는 영웅은 백성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도 철저히 고립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콜로세움 밖에선 공화정을 둘러싼 로마 지배계급 내의 모순이 펼쳐진다. 코모두스 황제의 폭정은 원로원의 의원들을 자극하며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모순을 종식시킬 새로운 ‘정치적 영웅’의 탄생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 여기서 공주의 중개로 막시무스와 원로원 대표의원 그라쿠스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지는데, 그라쿠스 의원이 막시무스를 로마 밖으로 빼주는 대신, 막시무스가 병사 5천을 데리고 쿠테타를 일으켜 코모두스를 처단함으로써 공화정을 부활시키자는 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막시무스를 현실의 유일한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서로의 생명을 하나의 것으로 연결하는 듯한 그라쿠스의 다음과 같은 대사에도 반영된다. “끝으로 당신, 절대로 죽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그러나 이 대사가 압축하고 있는 원로원과 막시무스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동지애와는 별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막시무스의 말이라면 죽음이라도 각오할 수 있는 그의 병사들과는 달리 그라쿠스는 막시무스에게 ‘절대 죽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둘의 관계가 공화정을 지지한다는 동일한 입장을 취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위태로운 동맹임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라쿠스가 막시무스에게 쿠테타 이후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거듭 약조 받는 장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즉, 정치적 영웅으로서의 막시무스는 정치적 필요성을 느끼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막시무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 쿠테타에 성공해야하는 또 하나의 부담을 떠안게 된다. 결국 그는 쿠데타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이전부터 이미 철저히 고립되어 있던 것이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스무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의 장군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충복이었다.

타죽은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살아서 안 되면 죽어서라도!”

막시무스를 전사적 영웅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정치적 영웅으로 바라보는 시각 중 어떤 것도 그에게 순수한 의미의 환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 이들 중 누군가는 그에게 호흡마저 멈출 정도의 극적인 싸움을 요구했고, 누군가는 그에게 영광스런 쿠테타의 한 장면만을 장식하고 퇴장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뛰어난 무예나 정치에 때묻지 않은 심성, 선왕에의 충성심이 막시무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면 그는 로마로부터 훨씬 더 빠르게 잊혀 졌을 것이다.

그런 그가 영웅이라는 이름의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은 바로 황제를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황제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막시무스를 영웅으로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막시무스 또한 황제 앞에 영웅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다만 태워 죽인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복수심만 온전히 칼끝에 담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순간만큼은 로마도, 콜로세움도, 검투사라는 신분도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영웅이 아닌 막시무스라는 이름의 인간을 지금껏 지탱시켜온 것은, 모든 것을 잃고 숨 쉬는 몸뚱아리 하나만이 남았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가장 근본적인 힘은 다름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분노와 복수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인간적인 복수심에 타올랐던 막시무스를 기억하는 관중은 없다. 관중은 또다시 철인 같은 영웅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한다. 선왕의 딸은 막시무스의 죽음 앞에서 ‘영웅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라쿠스가 나와 병정들로 하여금 막시무스의 시신을 후송하게 한다. 화면은 전환되고 흑인 검투사가 막시무스와 나누었던 말들을 되뇌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것으로 끝일까. 정말로 그들이 기념하는 영웅의 죽음은 헛되이 되지 않은 것일까. 그의 죽음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애초부터 ‘영웅’이라는 명칭이 막시무스 자신을 위한 단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사적 영웅과 정치적 영웅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로마의 요구 하에서, 막시무스는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위대한 만큼 쓸쓸하고 고독해야만 했다. 영웅의 무게감으로부터 탈각된 지극히 인간적이었던 순간도 그에게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죽음이후 그는 관중들과의 거리감이 불식되지 못한 콜로세움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되돌아와 죽음을 맞이했으며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인 감정보다 영웅적인 행위를 더욱 아름답게 기릴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지극히 인위적이어서 위화감을 남긴다.

‘영웅’은 신을 부르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 영화는 ‘한 인간이 영웅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부당하게 소비되고 착취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편의 생생한 기록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의 결말을 단순히 ‘영웅의 장렬한 전사’로 끝맺을 수 없는 이유이면서도, 콜로세움 및 로마에서 욕망의 대리자를 찾아 열광하던 무리와 함께 서있는 것이 혹시 나의 모습은 아니었는지를 반성하도록 만드는 거울과도 같았다. 나 또한 영웅의 신화에 사로잡혀 현실의 누군가를 철저히 소비하고 착취하는 흐름에 편승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하게 된 것이다.

물론 현실의 영웅이 막시무스와 다른 점은 영웅으로 칭송받는 존재가 스스로 그 영광에 도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타인의 욕구를 감당할 능력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그 욕구를 대리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얻는 영웅은 결코 ‘소비’ 및 ‘착취’와 같은 불결한 언어로 더럽혀지지 않을 것 같은 믿음을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웅’은 신을 부르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영웅은 신격화 될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이다. 영웅은 시간적이고 물리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언젠가는 기쁨과 성취감이라는 성격으로 수용했던 감정을 부담과 무게로 받아들일 날을 맞이해야만 한다. 즉, 영웅의 내적 역량 및 외부의 욕망 모두 가변적이기 때문에 영웅의 지위 또한 끝끝내 영원성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영웅은 타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소모되고, 그렇기에 끝내 소외당하는 운명에 얽매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스스로를 추앙하는 이에게조차 비극적인 거리감을 담보하며 고립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이름, 그것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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