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130

diary 2009/11/30 21:28

요 며칠새 몸이 말이 아니다.
이상하기도 하지, 잠을 푹 자도 입안이 허는 것을 보면.


몸이 약해질 때 
정말 견디기 힘든 건
마음까지 덩달아 약해지는 것.


자자 정신차리자구.
이제 곧 12월,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약한 것 같아'대신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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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형형 2009/12/01 0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푹자긴 했어?=ㅅ=

    • 문모양 2009/12/02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금요일 툐요일은 푹 잤는데
      나의 책 만드느라고 일욜날 밤을 새서 도루묵 ㅠ
      대신 월욜이랑 화욜은 아주 푹 잤어 ^^ ㅎㅎ



21세기, 카타리나 블룸의 방아쇠는 누구를 향하는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문 선 경


 하인리히 뵐은 황색 언론의 폭력에 의해 삶의 기반이 무참히 짓밟히는 한 여인을 위하여 이 소설의 제목을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제목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던지 밑에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까지 달아두었다. 이 친절한 책 제목에 근거하여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언론에 의한 폭력이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한 구절과 기괴하게 어울림을 파악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의 일생에서는 지극히 경미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언론과 세간의 호기심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그 미세한 지점으로부터 언론의 폭력은 얼마든지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폭력은 개인적인 삶의 변두리에 있던 사실들을 어느새 삶 전체를 규정짓는 결정적인 행적으로 왜곡하고, 주변 사람들의 언행을 맥락에서 절개해내어 그 의미를 강제로 변형시켜 폭력의 재생산 과정에 이식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한 개인의 명예는 처참히 붕괴된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폭력의 결과가 제목에서처럼 단순히 카타리나 블룸이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으로만 끝나는가? 물론 그녀가 삶의 기반이 되었던 착실함, 근면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그녀의 긍지들을 모조리 잃고 ‘살인범의 정부’로서, ‘테러리스트의 공조자’로서, ‘음탕한 공산주의자’로서 언론의 비난을 받는 ‘명예훼손’의 과정은 이미 그 자체로도 한 개인이 감당하기 버거운 비극이다. 그러나 언론의 폭력은 단순히 ‘명예훼손’의 차원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존재 양식’의 영역에서까지도 한 개인을 무참히 공격한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존재 양식까지 억압하는 언론의 폭력은 어떻게 자행되는가? 나는 소설에서 그것이 수리적으로 가장 치밀하게 묘사된 부분이 바로 다음과 같은 24장의 ‘기름 연비 분석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름 값은 그녀 자동차의 주행 거리 표시기가 보여주는 현저히 높은 숫자와도 관련되어 있다. 블로르나 씨 집과의 왕복거리는 약 6킬로미터, 히페르츠 씨 집과의 왕복 거리는 약 8킬로미터, 볼터스하임 부인의 집에 다녀올 때는 약 4킬로미터 거리라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고 한다. 넉넉히 계산해서, 평균 잡아 한 주에 한 번 시간외근무를 한다 치고, 이것 역시 넉넉하게 계산해서 20킬로미터로 보고, 이를 하루 주행 거리로 바꾸어 계산하여 약 3킬로미터 정도는 더 생각한다면, 매일 대략 21킬로미터에서 22킬로미터를 달리는 셈이다.....(중략)....거기에 2×8000을 더하면, 그녀의 자동차 주행 거리는 지금 72,000 정도여야 하는데, 실제로 거의 102,00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중략)....여전히 25,000킬로미터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대체 어디를 그리 자주 차를 몰고 다녔는지. 그러면 그녀가 - 그는 정말 다시 무례한 암시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의 질문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 혹시 누군가를, 아니면 여러 명의 사람을 어디선가 - 대체 어디서 - 만났다는 건가?


 타인에 의하여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그녀의 주행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미 주행기록으로 대변된 그녀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누구에게나 논리적인 하자 없이 똑똑히 이해되어야 하고 증명되어야 하는 백과사전 수준의 지식으로 낱낱이 파헤쳐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설명되지 않는 주행거리’를 놓고 파생되는 무례한 암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제 그녀가 자신의 삶의 궤적을 놓고 타인의 시선에서 딱 맞아떨어지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드러날 경우, 그 부분에 대해 즉각 해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불분명한 사안에 대한 불분명한 진술은 단순히 사법적인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카타리나 블룸 자신이 절대 허용하지 않았던 언론의 무차별적인 의심에 의해 완전히 다른 사실로 그녀를 공격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녀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기타 경비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본인조차 이유를 잘 모르고 돌아다닌’ 주행거리에 대한 책임과 까닭을, 자신의 필요가 아닌, 오로지 언론과 대중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궁금증으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억측과 모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누려야 하는 시간에 대한 주권을 박탈당한다. 이 ‘시간에 대한 주권 박탈’이야말로 한 개인의 ‘존재 양식’, ‘존재 주권’에 대한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예의 실추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존재 양식마저 위협하는 언론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하여 1974년의 카타리나 블룸은 일간지 기자를 향해 총을 쏘았다. 죄책감을 느껴보려고 돌아 다녀봐도 도통 그럴 수가 없기에 너무도 떳떳이 자백할 수밖에 없었던 27세 일반 여성의 범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당당함은 오히려 언론이 자행하는 폭력의 부당성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그러나 21세기의 카타리나 블룸은 어떠한가. 언론의 폭력은 나아졌는가? 그것은 한 개인의 명예를 이전보다 덜 훼손시키고, 그 존재 양식을 이전보다 덜 위협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언론의 폭력을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은 구시대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언론의 폭력을 자극할 수 있는 기술은 날이면 날마다 급속히 발전했다. 그리하여 한 개인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시간은 닷새가 아닌 하루, 아니 단 몇 시간으로 단축되고, 한 개인의 존재 양식을 위협할 수 있는 기록 분석과 악의적 발언의 수단은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 가운데 21세기 카타리나 블룸의 손에 쥐어진 총은 누구를 향하는가.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일간지 기자가 아니다. 21세기의 카타리나 블룸은 자기 자신의 머리를 향하여 총을 쏜다. 그것이 우리 현실의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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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2 2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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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있어야 할 것이 빛 속에 있을 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 푼짜리 오페라’를 읽고


 


문 선 경



 밝은 대낮, 달리는 차 안에서 멍청한 시선을 창 밖에 걸쳐두고 있던 중, 돌연 저편 도로 위에 치어 죽은 강아지(였던 것)의 시체를 볼 때, 그 검은 껍질과 시뻘건 살덩어리가 어지러이 뭉개진 흔적 어딘가에서 우리의 의식은 또 한 번 미세하게 구겨진다. 뒤이어 차에서 내려 도로를 걷는 빽빽한 인파들, 그 사이를 터무니없이 가르고 있는 어느 고개 숙인 걸인의 웅크린 상반신, 그 절반의 그림자 위에서 우리의 의식은 또 한 번 소리 없이 깨어진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 있어야 할 것이 빛 속에 있을 때, 지식의 범위 안에 있으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따라서 도무지 보고도 듣고도 싶지 않은 것의 형상을 아무 예고도 없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수용해야만 할 때의 비극이다. 그것이 왜 ‘비극’인가는 분명하다. 우리들 눈앞의 일그러진 풍경을 바로잡기에 우리의 손이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대부분은 이 놀라움과, 당황스러움과, 불편함이 뒤섞인 카오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소심히 시선을 돌린다, 눈을 감는다. 


 그런데 여기, 이 깊은 어둠 속에 기어코 스포트라이트를 들이대는 극작가가 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이트는 그의 희곡작품 『서 푼짜리 오페라』에서 걸인들의 구걸, 도둑들의 도둑질, 그리고 창녀들의 매춘행위가 난잡하게 포진한 19세기 말 런던의 그늘진 거리를 정숙해야 마땅할 오페라 무대의 한 가운데로 보란 듯이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거리의 유행가, 장타령을 정신없이 섞어가며 눈을 꼭 감고 있던 독자를 머리가 얼얼해질 만큼 흔들어 깨운다. 악명 높은 신사 강도 칼잡이 ‘매키’로부터 야밤에 남의 집 마굿간에서 결혼식을 올린 딸 ‘폴리’를 되찾기 위해 경시청장 ‘브라운’을 압박하는 거지왕 ‘피첨’,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의 사건들은 가족, 결혼, 우정, 사랑, 신뢰, 도덕 그 모든 것이 허울에 지나지 않는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와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긍정적인 의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온갖 배신과 욕망의 가락은 서푼어치도 되지 않을 인간 매키 매서에게 영국 여왕이 사면 및 신분 상승을 베푸는 다소 황당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불협화음은 책을 덮는 독자에게 결코 서푼짜리일 수 없는 삶의 무거운 고민을 부과한다.


 『서 푼짜리 오페라』에서 매키 매서에게 내려지는 사형선고는 정당한가? 물론 그는 이 도시를 둘러싼 도둑질, 방화, 살인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자, 여인에 대한 지조도 없이 성적인 욕망에 철저히 사로잡힌 채, 온갖 위기의 상황을 돈으로 모면하여 벗어나려 할 만큼 사악하고 비굴한 캐릭터이다. 따라서 그 정도의 개인에게는 응당 사형이라는 죄 값이 합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죄 값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수대에 오른 매키 매서의 그림자 속에 드리워진 모순된 현실의 무게가 그 한사람만의 몫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매키 매서가 교수대에 오른 이유는 직접적으로 법보다 돈의 문제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피첨’은 자신의 거지사업이 방해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잡아들이려 했고, ‘제니’는 돈에 매수당하여 그를 밀고하였으며, ‘브라운’은 대가가 불충분했기에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법은 명목상의 허울일 뿐, 돈이 실질적인 사회의 질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몰락해가고 있는 계층의 몰락해가고 있는 대표자’의 얼굴에서 다른 무수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매키 매서 한 사람을 사형시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현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사형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 앞에 ‘여왕의 사면’이라는 비현실적인 결말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 서푼어치 희망의 메시지도 허락하지 않는다. ‘왕의 말 탄 사신이 언제나 온다면 우리 삶은 쉽고 평화로울’ 테지만, 현실 속에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음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몰락해가고 있는 계층의 몰락해가고 있는 대표자’가 몰락하는 것이 마땅한 현실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비현실적인 반전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더 고착화하는 비극인 것이다. 여왕의 사면은 희곡 안에서도, 밖에서도 우리의 정답이 되지 못한다. 매키 매서라는 죄 많은 인간이 계속 살아있는 런던은 그의 생사여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돈의 질서에 의하여 또 무수한 범죄들로 가득찰 것이다. 심지어 여왕의 사면 따위 기대할 수 없는 무력한 현실은 ‘비명이 울려 퍼지는 이 골짜기’ 속의 하류 인생들을 차갑게 얼려 버릴 것이다. 결국 그 무엇도 해법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극은 철저한 비극이다. 등장 인물 뿐만이 아니라 읽는 독자마저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가 무력하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비극인 것이다.


 『서 푼짜리 오페라』를 읽고 난 후 마치 강아지의 찢긴 시체와 다리 없이 웅크린 걸인의 형상과도 같이 독자의 의식을 집요히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괴로움의 실체는 ‘고난이 가장 클 때 도움이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우리의 현실과, 그에 대한 우리 모두의 무력감이 뒤섞인 비극 그 자체였다.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소외된 것만 같은 거지들의 세상에서도 물질과 예속의 질서는 다시금 무한히 반복되고, 여전히 사랑과 우정과 신뢰의 일체는 배신, 불신, 기만의 상처로 얼룩져있다. 가끔씩 세상이 아름답게 빛나는 듯한 풍경 뒤에는 또 어느 이름 모를 이의 차갑게 얼어붙은 어둠이 눈물방울처럼 서려있을 것인지. 어둠 속에 있어야 할 것이 빛 속에 있을 때, 그 당황스럽고 불편한 의식의 교란을 헤집고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이 오페라를 향하여 던지는 서푼은, 그 무기력함 지우기 위해 지불한 값이 아닌, 도리어 우리의 무기력한 침묵이 현실에 지고 있는 빚에 대한 단 몇 푼의 이자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러한 빚은 도무지 청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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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2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꿀벌의 노래

-토마스 만의 [토니어 크뢰거]를 읽고



문 선 경



저 눈부신 태양 한 움큼을

간밤에 오롯이 붙잡아 두었느냐

나 다가서면 쉬이 녹을 듯

너는 황홀한 금빛의 결정

이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은

네게 닿으려하는 동경어린 몸짓.



아물지 못한 자연의 상처를 따라

저주스럽게 퍼덕이는 두 장의 날개

등에 낙인찍힌 자의 욱신거림이란

죽는 순간까지 지속될 나의 숙명

길 잃고 헤매는 꿀벌의 사랑은

날개 없는 너를 향한 우울한 질투.

 


자연의 표면을 응시하는 네 두 눈은

어찌 이리도 평온하고 단정하게 빛나는지!

스스로 풍성한 빛에 둘러싸인 너는

빛 떠난 자리의 서늘함을 정녕 모르도다

가슴을 짓누르듯 타오르는 이 사랑은

무지(無知)한 눈동자를 향한 극히 적은 경멸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빛나는 너,

생동하는 몸짓이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나의 냉혹한 열광에 온기를 더하는 너를 위하여

저 빛에 걸맞는 질서와 형상을 바치리라

마음으로 온전히 맹세한 이 사랑은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






 

소설 1장의 끝과 9장의 끝은 동일한 감정의 요소가 반복되는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동경과, 우울한 질투, 경멸, 그리고 행복감.

세월이 흐르고 포용할 수 있는 세계의 폭이 넓어져도

끝내 변하지 않는 이 네 가지 감정이 예술가의 숙명이 아닌가 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꽃을 향한 꿀벌의 사랑을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썼습니다.

혹시라도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을 읽으셨던 분들은 [토니오 크뢰거]를 읽어주세요.

이 단편은 저의 운문으로는 표현하지 못할 만큼 훨씬 더 아름답고, 고요한 산문입니다.

영혼을 덜어서 써낸 것만 같은 문장들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돕니다.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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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형형 2009/11/18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번째 이미지가 왜 안뜨지;;

    꾸준히 뭔가 문학작품을 읽는구나.. 심히 부럽....

  2. 2009/11/26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091111

diary 2009/11/11 23:52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머물렀던 자리에
향기 남기는 사람이고 싶다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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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4 0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2. 2009/11/18 1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