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주영냥과 문모양의 서울대 미술관 방문은엄밀히 말해 일탈이라고는 할 수 없다. 모름지기 일탈이란 기회비용에 구애받지 않는 당돌함이 수반되어야 하는 법. 그에 비해 두 여인은 중앙 도서관과 MoA사이가 느긋하게 걸어도 겨우 15분정도의 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관람시간을 대략 한시간으로 잡는다 해도 그것이바쁘디 바쁜 계절수업에 그리 큰 영향은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확정지은 후였다.

그러나일상의 변주라는 것은,설사그것이 수용 가능한기회비용 범위 내의 소심한 용기라 할지언정 언제나 그 시도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수줍은 시도는 종종 기대치도 않았던 수확을 가져다주기도 하므로! 적어도 오늘내 앞에서'시그마 폴케 : 미지의 세계에서 온 음악' 전시는, C chord(도미솔)의반복 끝에C Aug(도미솔#)가 더해지는 긴장된 순간의 침묵을 역설적인 혼효의 빛깔로 완연히 갈음하고 있었다. 투과와 결박이 동시에 일어나는 망점(網點)의 어지러짐 속에서.

시그마 폴케의 그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망점의 표현방식은 일차적으로 대중매체를 대표하는 TV 화면을 연상시킨다. 전자빔에 의해 주사되는 수많은 화소의 집합은 그의 그림에서형태와 음각이 부각된 망점의 나열로 표현된다.그것은현대인이다량 소모하는 대중적인이미지들이 한갖 무의미한 점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경고임과 동시에, 망점 사이로 투과되는 여백의 잔영에 섣불리 '현실'이란 이름을 붙이는 현대인의타성적 인식을 향한비판과도 같다.

그러나 시그마 폴케의 망점이허상의 이미지들을 단순히 '투과'하기 위한 시각 Tool 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망점을 '찍기'보다 하나하나 '그려냄'에 가까운 시그마 폴케의 흔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즉, 그는 TV나신문 속에서짧은 시간 무수히 복제된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친 수작업을 기반으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망점의 규율을 한 폭의 회화 속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로히 리히텐슈타인의 망점이 구멍틀을 사용한 매끄러운 형태의 망점이라면, 폴케의 망점은 구멍틀의 보조 없이 모든 점을 손수 그려넣은 불규칙적인 형태의 망점이다.)

'망점의 규율' 속에는 무수히 복제되어왔던 허상의 이미지 그 자체를 온전히 결박하려는 화가의 지배욕이 엿보였다. 오히려 윤곽선만으로 포섭되는 이미지의 형체는 그 내부에 색과 여백을 위한 일말의 자율을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너그럽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마치 한땀 한땀 실을 꿰어나가듯 모든 점을 손수 그려넣은 시그마 폴케의 망점은, 포착하려는 이미지 자체에 균질의 여백만을 허용할 뿐 그 외의 일체를전부 망점에 의해서만 온전히 구현될 수 있는 의존적인 형태로 변질시킨다. 무심한 듯 교묘한 망점의 지배 아래 투과되고 있다고 믿었던 여백마저도 실제로는열림을 가장한 닫힘의공간 속에 가두어지는 것이다.

3자의 지배욕구가 기저에 깔린 망점의 표현방식이 결합할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중매체의 소유불가능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소모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낡은 욕구? 현대사회의 판옵티콘? 회화를 바라보는 주체 혹은회화가 겨냥하는 대상에 따라 망점의 표현방식은 얼마든지 뒤틀린 의식의 부류와 결합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닌 듯 하다. 실제로도 그의 작품은 현대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고, 그 시선은 지나칠만큼 날카롭고 통찰력있는 것이기도 했다.

허나, 보다 근본적으로 망점 속의 지배욕구라는 것은 현실의 다른 무수한 대상과 결합하기 이전에 이미 우선적으로 회화작품을 만들어내는 화가 자신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숨막힐 듯한 허무의 이미지들이 예술적 감수성에 민감한 화가를 자극하여 그로 하여금 강력히 왜곡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주변의 현실을 회화 속으로 가져와야만 할 당위를 부여받은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망점의 표현방식이란 화가자신의 철학을완연히 쏟아낼 수 있는 사고의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망점의 표현방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온전할 수 없는 불완전한 도구이지는 않을까하고 조심스레생각해본다. 망점으로 대변되는 '이미지의 지배욕구'는 회화를 그리는 모든 이들의 내면적 욕구와 보편적으로 맞닿아있는 것이겠으나, 그것은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화가 내면의 폭발적인 에너지에만 기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미지의 원형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되 그것이 형체와 목소리를 모두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오로지 화자가 부여한 형태에만 무게를 두는위태로운 관계는 언젠가 망점 사이의 결합을 와해시킬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자신의작품 속에서도 이야기했던 '미지의 세계'는 분명 '망점의 세계'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작품에남겨진 음율감있는 붓질과 혼효된 색감은여전히 그의 안에 표현되지 않은 '무엇'의 존재를 어림잡을 수 있는 흔적으로 다가왔다. 망점들을 긴밀히 연결하는 힘은 망점 자체의 개성 뿐만이 아니라 그의 다른 회화적 기법에서도비롯되는 법. 40점의 작품들 속에서망점의 다양한 변주시도가 엿보인다는 점은흥미로우면서도 희망적인 부분이었다. 폴케가 생존하는 이상 앞으로도그의 작품들이 여전히 '미지의 세계'에 합당한 그림이 되리라 기대해본다. C Aug(도미솔#) 이후에도 여전히 음악은 지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Posted by 문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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